n개의 미래와 n+1번째 문학



“미래가 가장 중요하다. 먼 미래일수록 문학에 가깝다”

- 「새해」, 오한기




미래는 꽃무늬가 틀림없다



이것은 내가 작년 10월 21일 낙성대동의 모 카페에 앉아 썼던 문장이다. 그날은 토요일이었고 귀주대첩 998주년을 기념하는 강감찬 축제가 벌어졌던 날로서 학교에서 내려오던 관악02는 호암교수회관에 채 못미처 승객들을 모두 하차시켰고 이게 다 뭘까? 영문도 모른 채 낮게 걸린 만국기들과 사람들을 헤치고 자주 가던 카페에 진입한 나는 예정에 없던 피로와 더위를 느끼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켜서 마셨다. 기억이 난다. 이 더위가 여름이 채 가시지 않아서인지 축제의 열기 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카페 창밖으로 보이는 낯선 사물들에 대해서는 하나하나 알고 있었는데 그 앎이 무색하게도 전체적인 풍경은 비현실적이었다. 예를 들어 천 년 전 군복을 입은 장수들을 태우고 아스팔트 위에서 걷기와 달리기 사이의 속도로 움직이던 말들 같은 게 그랬다. 말들은 차량 통제를 위해 세워두었을 바리케이트 사이를 왕복하고 있었고 바리케이드 밖에는 그것을 신기하게 쳐다보는 미취학 혹은 취학 아동들이 있었으며 그 장면을 찍는 부모들과 부모의 부모들과 심심찮게 섞여 있는 외국인들부터 그들의 흥을 돋우는 사물놀이 패들까지가 대체 어디서 다 몰려왔는지에 대해서는 다시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카페의 창가 자리를 싫어했음에도 거기에 앉아 이 모든 것들을 보아야만 했는데 그것은 물론 인파의 일부가 카페로 유입된 덕분에 발생한 온갖 소음과 더불어 장날을 간과한 내가 감당해야 할 무엇이었다. 나는 집중은커녕 반쯤 혼란 속에 빠져 있었고 노트북을 열어 일기라는 명목 아래 아무런 말이나 써 댔으며 그중의 한 문장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런데 꽃무늬는 그렇다 치고 미래란 말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자문하기가 무색하게도 미래라는 말은 내가 작년부터 가장 빈번하게, 사실 거의 습관처럼 온갖 공란에 써 댄 단어로, 왜 그랬는지를 이제 와 돌이켜보면 그것이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미래가 없다. 아무리 좋게 봐 줘도, 거의 없다. 미래는 어디에 있나? 물론 그것은 자신의 사전적인 자리를 벗어난 적이 없다.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한 치 앞조차 불투명하던 역사적 격동기와는 달리 하루가 멀다 하고 온갖 지자체에서 각종 축제를 만들어 즐기고 있는 세상에서 그것은 이제 확고하고 부동한 무엇이다. 예를 들자면 강감찬 축제가 벌어진다고 플래카드가 나부끼면 얼마 뒤 정말로 강감찬 축제가 벌어지는 그것이 작금의 미래인데, 바로 그것이 미래를 없게 만들었다는 확신을 나는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미래가 미래를 없앴다. 물론 이 확신(혹은 불신)은 내가 만든 것도 나만의 것도 아니다.


“19세기에 태어날 걸 그랬어. 이런 미래를 몰랐을 거 아냐.

옐친은 기분 나빠, 내가 싫어하는 그 새끼 비슷해.

개좆 같은 새끼야. 개좆 같은 세기; 그런데 왜

그들보다 내가 더 아프냐아?

걱정 마. 노태우가 내 꿈에 나타나진 않아;

교활한 것보다 무자비한 쪽이 더 낫다 할까?

이상하지, 난 돈은 못 버는데 잘 산단 말야.

부패에서 올라온 거품의 浮力이 나까지 뜨게 한 걸까?”


-「우울한 거울 2」 부분


황지우가 1998년에 낸 시집 『어느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는 소련 붕괴(정확히는 공산주의 혁명의 실패) 이후 비루한 생활인/가장으로 살아가는 자신에 대한 애석함으로 가득한 시집이고 (당연히) 그는 나보다 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교활한 것보다 무자비한 쪽이 더 낫다 할까?”라는 역설적인 물음은 물론이거니와 기실 그가 이 시집을 마지막으로 시 쓰기를, 적어도 시집으로 묶어내기를 그만둬 버렸다는 데서 알 수 있다. 시집 전체를 감싸고 있는 그의 우울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두말할 것도 없이 “노태우”로 대변되는, 도래해 버린 “미래”가 그가 믿었던 미래와 전혀 다르다는 데서 기인한다. 얼마나 달랐냐면 그로 하여금 겪어본 적도 없는 과거(“19세기”)를 호출해낼 만큼 달랐다. 다시 이십 년이 지난 시점에 이걸 읽고 있노라면 그의 실낱같던 믿음에 동의가 되면서도 그가 얼마나 순수(혹은 순진)했는지가 보여 안쓰럽기까지 한데, 물론 이 감정은 지금의 나에 대해서도 그대로 느껴지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면, 황지우에게 “그래도 노태우가 전두환보다는 낫지 않나요?”하고 묻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우리는 미래가 무엇인지부터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는 말이다.




이 티셔츠 주운 건데요



『천국에서』나 『풀이 눕는다』를 통해 동시대 청년/예술가들의 초상을 다분히 절망적으로 그려온 바 있는 김사과는 산문집 『0 이하의 날들』에 이르러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는데, 그것을 일반화시켜 보편성이나 객관성을 획득하기보다는 자신의 내면을 집요하게 파고들려 한다는 점에서 흥미롭게 읽힌다. 그는 이십 대 초반이자 대학 초년생이었을 2000년대 중반에 벌써 “내 삶이 망했다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이 망함에 대한 감각은 김사과의 소설 세계를 집요하게 관통하는 것이어서 데뷔 이래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어 나타나 왔다. 작년에 출간된 소설집 『더 나쁜 쪽으로』의 표제작 「더 나쁜 쪽으로」는 제목에서부터 노골적으로 작가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소설로, 요약하자면 온갖 세련되고 힙한 것들이 포진해 있는 거리에 속한 ‘나’와 거리의 현현된 역사라 할 ‘그’가 그 거리를 빠져나가지 못하는 이야기이며, 외국인들과 함께 하는 파티를 지나 소설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그가 찡그린 채 눈을 감는다. 오늘밤 그는 잠들지 못할 것이다. 그에겐 지독한 불면증이 있다. 그게 내가 그에 대해 아는 전부다. 잠을 빼앗긴 밤, 그는 늪으로 향할 것이다. 기적 없이. 그리고 우리 착란의 피난민들의 운명은...... 뒷걸음질을 치던 나는 벽에 부딪힌다. 아무도 나를 보고 있지 않다. 나는 부엌을 지나, 출구로 향한다. 문이 열린다. 아주 쉽게 그렇게 나는 그곳을 빠져나온다. 계단을 뛰어내려오는데 뭔가 사라진 것이 느껴진다. 어, 죽어버렸다. 신기하다. 나는 중얼거린다. 신기하다. 건물 밖, 어둠이 쓸려나간 거리는 새벽의 푸른빛이 채우고 있다. 새벽의 냉기가 폐를 채운다. 문득 내가 맨발인 것을 깨닫는다. 발에 닿는 바닥이 얼음처럼 따갑다. 텅 빈 거리, 잠에 빠진 상점들의 쇼윈도에 내 모습이 비친다. 하지만 비치는 저 형상은 내가 아니다. 그렇다면 누구인가. 대체 뭘 하고 있는 건가. 여기는 어디인가. 내가 알던 거리는, 내가 알던 그들은 모두 어디에 있는가. 아아, 기억난다. 그들은 늪으로 향했다. 그뒤는 모른다. 저기 같은 방향을 향해 걷는 저자들을 더이상 모른다. 여기는 내 거리가 아니다. ......향해 걷는다. 해가 떠오른다. 햇살 아래 깨어난 거리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알 수 없다. 걷는다. 더 나쁜 쪽을 향해 걷는다." 


여기에는 트릭이랄 것도 없는 트릭이 숨어 있는데, 아니다, 모른다, 없다로 끝맺고 있는 문장들을 사실은 맞다, 안다, 있다로 고쳐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화자가 겪고 있는 곤경은 쇼윈도에 비친 저 형상이 바로 ‘나’이고, ‘나’는 같은 방향을 향해 걷는 저자들을 아주 잘 알고 있으며, 햇살 아래 깨어난 거리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도 너무도 잘 안다는 데 있다. 중간에 등장하는 ‘늪’은 이렇게 역설적으로만 성립하는 ‘알 수 없음’의 형상으로서 이미 소설의 중반부에 “착란 속의 피난민들, 거대한 황무지 늪에 도착하여 자신들이 낙원에 도착했음을 확신한다”는 문장을 통해 언급된 바 있다. 그들(‘우리들’)이 늪과 낙원을 착각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들은 모두 역사가 끝나는(혹은 역사 이전의) 지점에 자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거리의 모든 미래를 알고 있고, (때문에) 그것은 과거와 하등 다를 바가 없으며, 그 지점에서 필요 이상으로 돌올하게 튀어나오는 것은 바로 탈-역사화 된 존재로서의 현재다. 그렇기 때문에 김사과의 소설 속 인물들은 본드나 마약(「나와 b」), 더 나아가면 범죄(「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오늘은 참으로 신기한 날이다」)고 더 나아가지 못하면 음악(「더 나쁜 쪽으로」)인 비현실에 탐닉하게 된다.


때문에 당연하달까 그의 소설의 귀결은 자기파괴나 파국으로 치닫는 경우가 많고 나는 거기서 혀를 내두르게 되는 지점이 있는데 (반-)영웅에는 미달하고 속인에는 실패하는 그의 인물들을 독자인 우리가 결코 재현할 수 없으며 그런 한에서 우리는 수족관의 물고기들을 보는 것처럼 그의 소설을 안전하게 관람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의 소설이 현실에, 또 현실이 소설에 틈입하지 않는/못하는 것은 작가 본인의 의지가 다분히 반영된 것처럼 보이고 그래서 그가 「박승준씨의 경우」나 「이천칠십×년 부르주아 6대」와 같은 소설들을 써 낸 것이 전혀 놀랍거나 새롭지 않았으며 나는 그 소설들을 굳이 분류해야 한다면 SF라고 말하고 싶다. 반대로 말하자면 SF적 상상력을 동원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잃을 것 없는” 사람들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세계에 대해 행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시대에 우리는 진입해 있다는 것이 아닌가?


소설만 읽으면 그가 지독한 염세주의자일 것만 같은데 다시 산문집으로 돌아가면 그는 문득 “다른 예술은 가능하다”는 주장을 편다. 다른 예술이란 “패배가 아니라 승리에 대한, 환멸이 아니라 가능성에 대한 예술”이며 이를 위해 “지금 우리 예술가들에게 필요한 것은 더 강한, 절대 패배하지 않는 자의식이 아니라, 오히려 자의식 전체를 뒤흔드는 투쟁이다. 그 투쟁은 예술 안과 밖에서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그는 소설이 한때 사람들로 하여금 “같은 것을 상상하게” 함으로써 무엇인가를 현실화시켰고 그리하여 문학이 사회적 기능을 담당한 때가 있었으나 “언젠가부터 예술은 보편성을 포기했다. 그렇게 자유를 얻은 뒤 거침없이 하찮아졌다”고 말한다. “이제 예술은 짜릿한 유사 환각 체험이나, 자기치유, 기발한 재미, 소시민적 여유 따위를 추구한다. 자기들만의 소박한 세계에서 작은 파티를 열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쓰레기로 가득한 세상’ 앞에서 “절망의 반복을 중단할 때가 되었”으며 “더 늦기 전에 움직여야 한다”고 말한다. 상상력의 힘은 아직도 유효하기 때문에, 그는 소설가로서 “상상해내야 한다. 가능한 다른 미래를 발견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미적 언어의 기만



일견 고개를 끄덕일 법하지만 그가 그려온 도저한 절망에 비해 너무 쉽게 호출되는 것 같은 ‘다른 미래’가 나로선 의아한 측면이 있는데, 기실 그에게는 하나의 감정/문장이 숨어 있으니 그것은 바로 “모르겠다”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이란 걸 해봐도 소설이 무엇을 할 수 있고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고 그런다고 세상이 과연 바뀌기나 할지 어떨지 모르겠다는 것. ‘늪’ 이후에 무엇이 있는지 모름과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름은 우리를 총체적 무지, 곧 불능의 상태로 밀어 넣는다. 산업혁명 직후 소스타인 베블런은 “자본주의라는 것의 특징은 현재 산업 활동에 필요한 기계 장비의 최소 단위가 어떤 개인이 스스로의 노동을 통해 우회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크며, 또 어떤 한 사람이 혼자서 작동시킬 수 있는 것보다 더 크다는 점이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물론 기계라는 물리적 단위에 대해서 한 말이지만 나는 이 불능이 김사과가 ‘쓰레기로 가득한 세상’에 대해 느끼고 있는 그것과 거의 다르지 않다고 여겨진다. 그가 느낀 “신뢰를 바탕으로 한 개인들의 연대”의 가능성 및 필요성 또한 바로 이런 지점에서 제기되는 것일 터이다. 


연대는 정치적 방법론이다. 그리고 예술가들의 정치는 물론 예술을 경유한다. 하지만 어떻게? 예술, 그중에서도 문학과 정치의 관계에 대해서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나? 내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장면들은 국문과 수업에서 접한 1930년대의 카프와 구인회 사이의 묘한 간극이나 1960년대의 참여-순수 논쟁 따위인데, 당시에도 (김사과의 표현을 빌자면) 세련되지 못한, 이상한 대립 구도라는 생각을 했으나 그런들 의외로 쉽게 결론이 나오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민주화를 쟁취한 1990년을 전후로 이러한 구분의 첨예함 혹은 유효성이 한풀 꺾이고 포스토모더니즘이라는 격랑과 문학동네라는 모델의 등장 이래 창비와 문지의 차이도 별다른 의미가 없어지고 마침내 가라타니 고진이 ‘근대문학의 종언’을 고한 즈음, ‘미래파’로 칭해진 일군의 시인들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격렬한 논쟁이 시작되었는데 왜냐하면 민주주의가 어떻게 되었든 세상에서는 여전히 불합리하고 시대착오적인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일견 “자폐적이고 이기적”으로 보이는 문학이 나타났기 때문으로, 진은영은 이에 관한 일련의 논의들을 두고 <감각적인 것의 분배 : 2000년대의 시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러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나를 난감하게 만드는 문제, 즉 문학과 윤리 또는 미학과 정치에 관계에 대해 영원 회귀하는 질문들 그리고 그 대답들로 느껴진다.”


그는 랑시에르의 논지를 받아들여 ‘미학 = 감각의 수용능력을 다루는 학 = 감성론’이라는 주장에서부터 출발해 “문학을 비롯한 예술 전반의 문제는 ‘감각적인 것을 분배하는’ 문제이며 그런 한에서 필연적으로 ‘정치’와 관계한다”고 말한다. 근대 예술은 ‘윤리적 체제’와 ‘사회적-재현적 체제’를 거쳐 ‘미학적-감성적 체제’에 이르렀으며 2000년대 이후 한국 시인들과 비평가들의 자의식에는 해당 관점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체제 내에서 예술이 ‘감성적 자율성’을 획득할 때 그것은 “세계의 낡은 감각적 분배를 파괴하고 다른 종류의 분배로 변환시킴으로써 삶의 새로운 형태들의 발명”을 이루어낸다. 즉, 예술이 정치에 이르기 위해서는 감각/감성(의 재분배)를 이루어낼 수 있어야 하는데, 물론 모든 예술적 시도가 이에 이르는 것은 아니며, 이 지점에서 예술의 ‘정치’는 ‘치안’과 구분된다.


““폴록을 말레비치와 비교하면 후자가 새로운 사회적 형식과 삶의 새로운 역동성의 발명의 문제를 제기한 것이 확실합니다. 그리고 폴록은 그것과 확실하게 다릅니다. 폴록은 행동주의 예술 안에서 어떤 형식의 종말이었으며, 1930년대 미국에서 아주 강하게 작용했던 사회적 실천 안에서 예술적 개입의 종말이었습니다.” 폴록은 새로운 삶의 형식을 창조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오히려 미국 예술계는 냉전체제하에서의 소련의 이데올로기나 맑스주의와 경쟁하기 위해 폴록의 추상주의에 주목했다. 그런 의미에서 폴록의 작품은 네거티브한 방식으로 정치적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랑씨에르가 말하는 정치성이란 기존의 지배적 담론체계에서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옹호하거나 공격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지배적 담론체계를 파열시켜 새로운 종류의 감성적 분배를 가져올 삶의 형식을 만들어 내는 데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폴록의 작품은 현실의 감각체계와 불화를 일으키는 ‘정치’의 논리보다는 ‘치안’의 논리에 가깝다. 새로운 실험의 정치성이란 다른 삶의 실천영역들과의 상호 관계 속에서 감각체계의 변화를 가져오느냐 여부에 따라 식별될 수 있을 뿐이다.”


이론가 진은영이 이렇게 말할 때 시인 진은영은 어떤 일을 하고 있었는가? “최근의 두 가지 작업을 예로 들어보자. 하나는 미학적 실험의 사례로서 6명의 시인들이 두 명씩 조를 이루어 상대 시인의 시에서 나온 단어 30-40여개를 활용하여 시를 쓰는 작업이다. 다른 하나는 용산참사 현장을 방문하고 그와 관련해서 인터넷 언론에 글을 쓰는 작업이다.” 그는 이 두 작업의 지평이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 시인의 ‘모럴’이라는 층위에서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각 지평에 대한 ‘선험적transcendent’ 태도를 가지고서 편의주의적인 감성과 형식으로 작업에 임하지 않는 한 시인은 항상 곤경에 임하게 되는데, 이 곤경이 열어 보이는 심연이야말로 시인의 ‘모럴’이 자리하는 곳이라는 측면에서 두 작업은 문학적 실험의 지평에서 공존하며, 반대로 타자의 언어가 주는 질료적 저항감을 온몸으로 느끼며 언어의 형식을 만들어나갈 때 발생하는 교감이라는 측면에서 두 작업은 참여의 지평에서 공존하기도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과연 이 두 작업은 같은 평면에 자리하는 종류의 것인가? 만약 그가 용산참사 현장에서 전자의 작업을 하고 문지문화원 사이가 주최한 Media@Text Fest에서 후자의 작업을 했더라도 각각의 의미는 어긋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단지 ‘감성의 재분배’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나는 여기에 부정적이고, 때문에 그가 랑시에르를 끌어들이고 너무 먼 길을 돌아가면서까지 이 둘의 접합-화해를 무리하게 시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둘을 교차시켜 볼 때 음미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이들을 굳이 한 평면 안에 압착시키는 순간 오히려 유비를 가능케 하던 거리는 사라지는 게 아닐까. 여기서 발생하는 문제는 이런 것이다. 진은영의 글은 스스로 언급하고 있는 랑시에르의 일침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가? “미적 언어의 기만 : 평범한 슬픔을 기이하게 표현한다. 사소한 불행을 미화한다. 공허를 치장한다. 한숨 혹은 빈정거림을 미사여구로 꾸며서, 언어를 통해서 존재한다.”




우리는 오늘 과장하지 맙시다



물론 기만은 필요하다. 즉, 2000년대에 미래파가 있었다면 2010년대에는 후장사실주의자들이 있다. 이렇게 말하면 수많은(수많은?) 한국문학 애호가들의 반발을 살 것 같지만 그래도 어쩔 수가 없다. 물론 2010년대에도 좋은 작품들은 많이 있었다. 그런데 좋은 작품들은 사실 언제나 많았다(그리고 언제나 없었다). 내가 그들을 주시하게 된 계기는 그런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리기에(정확히는 내리고 치워버리기에) 적절한 언어가 내게 없었다는 데에 있다. 나는 오한기와 정지돈의 소설들을 보고 이들이 사기꾼인지 아닌지 끊임없이 의심해야 했으며 금정연은 글을 너무 못 쓰는데도 승승장구하는 게 납득되지 않았고 박솔뫼는… 나쁜 친구들을 만나 잘못된 길로 빠졌다고 생각했다(이상우는 읽어보지 않았다). 이제는 정작 본인들은 이런 평가에 관심 자체가 없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고 실제로 별 의미도 없다는 생각을 하는데, 그 사이 정지돈은 개인적으로 꽤 신뢰하는 작가 중 한 명이 되었고 그것은 그의 산문이 소설과는 다르게 설득력이라는 걸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지돈과 금정연이 함께 쓴 『문학의 기쁨』의 목차는 ‘새로운 문학은 가능한가?’라는 물음으로부터 출발해 ‘우리가 미래다 We Are the Future’라는 선언으로 끝나며 여기서 미래, 라는 단어를 다시 보았을 때 나는 좀 아찔해졌다. “우리는 왜인지 모르겠는데 어느 날부터 글을 읽고 쓰는 게 너무 좋았고 그래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금정연은 메일에서 우리는 어디로 가나요라고 물었다. 나는 to the future라고 답했고 금정연은 다시 we are the future라고 답했다. 그렇다. 미래가 예전 같지 않다.” 책의 마지막 문장이기도 한 ‘미래가 예전 같지 않다’는 핀란드 출신의 미디어 아티스트 미카 타닐라의 다큐멘터리에서 따온 것이며 대체 이런 걸 어디서 볼 수 있는 거지?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큐멘터리의 내용이 아니다. 나는 이 진단, 그러니까 김사과가 자신의 삶에서 체현하고 그것을 소설로 승화시키며 힘겹게 얻어낸 미래에 대한 (그것이 망했다는) 진단과 다르게 외삽되고 있는 이 진단의 방식이 흥미로웠는데, 기실 그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정치적 곤경에 대해 심각해지는 일이 없으며 금정연의 “저는 한 집안의 가장입니다” 운운은 황지우의 그것과 전혀 다르다. 정지돈은 본인의 첫 소설집 말미에 평론가의 해설 대신 이런 내용이 담긴 자선 산문을 실은 바가 있다.

 

“문학이 문학이 아닌 것이 되어야 하거나 될 수 있는 것은 애초에 문학이 순수문학이었던 적이 없었으나 모더니즘의 환상, 자율성의 신화가 문학을 문학으로 회화를 회화로 만든 것 아닌가. 새로운 장르와 자본/상업주의에 맞서야 한다는 이유로 떼를 쓰고 있었던 것 아닐까. 과거로 돌아가자거나(‘원래의 모습’으로) 미래의 전위는 통섭, 횡단, 접합이다 따위의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우리가 전진도 후진도 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브뤼노 라투르는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1991)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결코 전진하거나 후진해본 적이 없다. 우리는 언제나 다른 시대들에 속하는 요소들을 활발하게 분류했던 것뿐이다. 우리에게 아직도 분류는 허용되어 있다. 시간들을 형성하는 것은 바로 분류에 의해서이지 시간이 분류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결코 미래로부터, 혹은 시간의 깊이로부터 도착하는 동질적이고 전지구적인 흐름 속으로 뛰어든 적이 없다. 오랫동안 계속 커지면서 바로 지금 다시 흐르게 될 조류란 없다. 이러한 조류는 존재해본 적이 없다. 우리는 얼마든지 자유롭게 다른 사물들로 나아갈 수 있다 – 다시 말해 언제나 서로 다른 방식으로 경과한 다수의 존재들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이해한 바는 이렇다. 기왕의 미래에 대한 우리의 개념은 한동안 옳았거나 적어도 유효한 것이었으나 이제는 막다른(혹은 무한한) 골목에 이르러 ‘망했다’는 말만을 반복해서 출력해대는, 건전지 넣은 인형 같은 것으로 쪼그라들어버렸다. 이러한 미래를 마주하고 있는 ‘현재 적절한 것으로서 요구되는’ 문학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그러나 대답의 가부에 앞서 적절치 않다는 것. “만일 정말 역사가 뒤섞여 있고 시간이 혼재한다면 역사적 형식은 환상에 불과한 것 아닌가. 또는 형식의 필연성은 환상이 아닌가. 그렇다면 미래의 방법론을 탐구하거나 ‘과거’의 방법론을 경멸하는 것, ‘현재’에 적확한 형식이 있다는 생각 역시 우스꽝스러운 것 아닌가.” 하여 정지돈도 금정연도 별다른 확답을 내놓지는 않는다. 그들은 다만 “하스미 시게히코 식으로 말하면 픽션이고 데이비드 조슬릿 식으로 말하면 노이즈이며 데이비드 그레이버식으로 말하면 놀이”인 어떤 전망을 조심스럽게 제시하며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권력투쟁의 장에서) 빠져나오는 것, 관두는 것”임을 천명하는데 이렇게 미끄럽게 빠져나가는 게 가당키나 한가? 의심과 불만이 가시는 건 아니지만 모든 것이 ‘정치’의 영역에서 ‘치안’의 영역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느낌만은 나에게도 어째 확고한 데가 있다.


어쨌든 후장사실주의자들을 미래파와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면 노골적인 메타적 시선 외에도 자신들의 이름을 자처하고 있다는 사실을 꼽을 수 있을 것이고 나는 이것이 ‘연대’에 대한 하나의 의지라고 보았다. 과연 그렇게들 생각하는지가 궁금하여 알라딘에서 『문학의 기쁨』의 독자 서평을 살펴보았더니 “? 지들끼리만 즐거우면 뭐하냐?”라는 것이 있었는데 나는 바로 이것이 그들이 바라던 것이라는 느낌 또한 지울 수가 없다. 누가 속은 것일까? 나인가 익명의 서평가인가? 다만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이미 모두가 즐거울 수 있는, 적어도 모두를 즐겁게 하려는 무엇을 문학이 생산할 수 있던 시절은 (있지도 않았지만) 다 지나갔으며 거기서 ‘노이즈’ 따위는 용납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대신 우리는 영화와 게임과 웹툰을 비롯한 수많은 새로운 장르와 코드들을 가지게 되었고 아마 그것들도 언젠가는 지금의 문학과 같은 일을 겪게 될 것인데 그 관점에서 지금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은 과거(예컨대 고진적 의미에서의 근대문학)와의 연결고리를 찾아내 자신의 지위를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사진의 등장 이후 회화처럼 전혀 다른 어떤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너무 오래된 미래가 아닌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의 착각/착란 또한 그만큼 오래되었다는 것이다. 




God Save the Queen



프랑코 베라르디 비포는 이렇게 말한다.


“미래는 명백한 개념이 아니라 문화적 구성물이자 투사물이다. 신학적 문화의 영역에서 살았던 중세인들에게 완전함이란 신이 우주와 인류를 창조한 과거에 속한 것이었다. 따라서 역사적 존재는 낙원에서의 추방, 버려짐, 본래의 완전함과 단일함의 망각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미래에 관한 신화는 근대 자본주의에 그 뿌리를 두고 등장했다. 근대 자본주의 경제의 팽창과 그에 따른 지식의 팽창이라는 경험에서 말이다. 현재보다 미래가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생산 모델의 독특성이 낳은 가상효과이다. 신대륙을 발견하고 세계지도를 다시 그리기 시작한 이래로, 즉 근대가 시작된 이래로 근대성이란 세계의 한계를 확장하는 것이라 규정됐으며, 현재 자본주의 경제의 독특성은 바로 물질적 재화와 지식 영역의 끊임없는 확대로 이어지는 잉여가치의 축적에 있다. 

1850년부터 1950년 사이에 미래에 관한 신화는 최고조에 달했고 맹신 이상의 것이 되어버렸다. 미래에 관한 신화는 경제 성장이라는 현실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해석인 '진보' 개념에 기반한 진정한 신념이 된 것이다. 정치행위도 진보하는 미래라는 이런 믿음의 견지에서 재구성됐다. 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아나키즘에 이르기까지, 근대 정치이론의 서로 다른 일파들이 다음과 같은 공통의 확신을 공유한다. 즉 현재는 암울하지만 미래는 밝을 것이라는 확신을 말이다.”


그렇다면 ‘망함’은 필연적인 결말일까? 2016년 말 대한민국에서는 정치와 문학 각각에서 전례 없는 커다란 사건들이 있었고 이를 각각 ‘최순실 게이트’와 ‘#문단_내_성폭력’이라고 명명해보자. 이 두 사건의 내용은 전혀 판이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권력관계 내에서 감춰져 온 온갖 추악한 일들이 수면 위로 떠오른 일이었다고 한다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여겨지며 무엇보다 내가 주목하게 되는 지점은 이 두 사건이 발생한 시기가 거의 같다는 데에 있다. 이제 와 정계나 문단 내에 있어온 만행과 그에 따른 추문들이 얼마나 공공연하고 뿌리가 깊은 것인지 우리가 모르지 않을진대 이걸 과연 우연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김홍중이 인용하는 지그문트 바우만은 “미래의 꿈을 향해 현재의 만족을 포기하고 지연하는 것을 일반적인 의미에서 근대성(근대적 행위)의 핵심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리처드 세넷은 자본주의의 핵심동력이 결국 "시간-엔진time-engine"의 발명, "미래에 보상을 받을 것이란 희망"의 발명에 있음을 지적한다. 이렇듯 자본주의는 “단순한 경제시스템이 아니라 거기 연루된 행위자들의 심적 에너지를 조직하는(낙원을 꿈꾸게 하는) 마음의 시스템이라는 사실, 그리고 그런 마음의 시스템으로부터 창발하는 독특한 실천양식들의 기원에는 경제적 이해관계를 향한 욕망이 아니라 종교적 구원을 향한 강렬한 '꿈'이 있었다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품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해당 사건들이 ‘꿈’을 미끼로 온갖 끔찍한 이면을 은폐시키는 쪽으로 작동하는 알고리즘을 가진 ‘시스템’으로서의 기존의 ‘미래’에 균열이 발생할 수 있다는, 즉 ‘시간-엔진’이 고장날 수도 있다는 징후적 풍경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것은 너무 성급한 결론이 아닌가? 이 질문은 피해가서도 안 되는 것이지만 그보다는 피해갈 수도 없는 것인 것이, 이 사건들은 동시에 그 과정이 결코 일시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명백히 드러내보였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햇수가 두 번 대통령이 한 번 바뀌고 난 지금, 뇌물 공여 혐의로 구속되었던 이재용은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났으며, 문지의 설립자 중 한 명인 김병익은 성추문 전력이 폭로된 고은 시인에 대해 “돌출적 존재” 운운하며 감싸 돌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것이 현재에 도래해 있는 과거의 미래다. 부디 내가 여기서 개개인의 잘잘못을 따지려 한다거나, (문학이) 맞서야 할 대상이 특정한 체제나 권력구조라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님을 알아주길 바란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현존하는 모든 미래는 그것이 자신의 자리를 점하는 순간 온 힘을 다해 부동하려고 하며, 때문에 도래해야 할(지금은 없는) 미래는 결코 한 번의 광장이나 한 장의 지면 위에서 뚝딱하고 발명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다시 현재를 소환할 수밖에 없는데, 미래를 구축하기 위해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현재를 견지해내야 하는 동시에, 현재가 미래에 목적론적으로 복무하는 일을 막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 관점에서 요구되는 예술적 태도/형식이 바로 ‘픽션’이고 ‘노이즈’이고 ‘놀이’인 것이 아닌가. 즉 ‘미래가 예전 같지 않다’는 진단은 사후를 관조할 때가 아니라, 반대로 ‘미래가 예전 같지 않(아야 한)다’고 읽힐 때에만 기능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입장은 미래를 선취한다는 점에서 필연적으로 일종의 기만이 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로서 (어쩌면 가장 손쉽게) 행해지는 것이 예술을 미래 그 자체로 형상화하는 행위인데, “그중 대표적으로 두가지만 꼽자면 파국(혹은 종말)과 유토피아를 들 수 있다”. 지젝과 바디우로 위시되는 이론가들에 따르면 ‘역사의 종말’이란 기실 ‘유토피아의 종말’에 다른 이름에 불과하기에 “거짓 신화와 맞서 싸우기 위해 가장 긴급하게 요청되는 것은 ‘유토피아의 (재)발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궁극적으로 ‘시간-엔진’을 전용(轉用)하는 일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유토피아적 제스처” 자체는 무해한 것일지언정 그러한 (종교적) 이상들이 현실로 넘어오는 경우에는 그것이 필연적으로 폭력의 형태를 띠기 때문이다. 여기에 딜레마가 존재한다. 힘을 제압하는 힘의 논리처럼 미래를 제압하는 미래의 논리가 등장하는 것이다. 여기에 문학의 가능성이 존재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정치의 미학이 관할하는 영역 너머에서, 미학의 정치로 행해내야 하는 어떤 것일 터이다. 나는 그것이 앞서 말한 기만을 역이용하는 일, 즉 예술과 미래의 위상차를 유지함으로써 미래에게 기만당하지 않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를 위해서 우리에게는 도열된 미래(들)보다 더 많은 문학이 필요하다. 다만 이것은 문학의 신화화가 아니라, 미래의 탈신화화로부터 시작될 터이다.




CREDIT 



(출처 http://www.ganggamchan.com)


  • 황지우,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문학과지성사, 1998
  • 김사과, <<더 나쁜 쪽으로>>, 문학동네, 2017
  • 김사과, <<0 이하의 날들>>, 창비, 2016
  • 김사과, <트럼프 0년의 단상>, <<문학과사회>>, 2017년 봄호
  • 심보선, <우리가 누구이든 그것이 예술이든 아니든>, <<그을린 예술>>, 민음사, 2013
  • 소스타인 베블런, <<자본의 본성에 관하여 외>>, 홍기빈 역, 책세상, 2009
  • 진은영, <감각적인 것의 분배>, <<창작과비평>>, 2008년 겨울호
  • 진은영, <시와 정치 : 미학적 아방가르드의 모럴>, <<비평문학>>, 2011년 봄호
  • 금정연×정지돈, <<문학의 기쁨>>, 루페, 2017
  • 정지돈, <일기>, <<문학과사회>> 2016년 봄호
  • 정지돈, <all good spies are my age>, <<문학과사회>>, 2017년 여름호
  • 프랑크 베라르디 비포, <<미래 이후>>, 강서진 역, 난장, 2013
  • 김홍중, <<사회학적 파상력>>, 문학동네, 2016
  • Analrealism 편집부, <<Analrealism vol.1>>, 서울생활, 2015




( <청년문학> 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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