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왜냐하면 그는 낸시가 아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두 사람만큼 대조적인 인물을 상상하기도 힘들겠다). 최근에 전화가 연결된 한 청취자는 그에게 "그만 극복하라"고 말했다. 2006년 슈퍼볼에서 시애틀이 주심 빌 리비의 끔찍한 오판 탓도 있고 해서 졌던 일을 말하는 거였다. 소프티의 대답 : "아무것도 극복하지 마세요." 이것이 그의 철학의 전부다. 이것이 내 철학의 전부다. 실패는 유일한 주제다.

   우리들 각자는 괴로워하는 개인, 예술가, 사업가가 뒤죽박죽으로 섞인 존재일 따름이다. 누가 알겠는가? 어쩌면 말러의 스타일도 연기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내게는 그의 페르소나가 상당히 '진짜'처럼 느껴지지만 말이다. '진짜'의 의미가 뭐든, 나는 워싱턴 대학 풋볼 팀이 이겨서 소프티의 목소리가 흥겨워지기를 바라고, 왕국의 미리에 대한 그의 기대가 실현되기를 바란다. 그런데도, 팀이 지면, 나는 오전에 한시바삐 아래층 '작업실'로 내려가 일하는 척하면서 그가 한두 시까지 전화를 받는 걸 듣고 싶어 좀이 쑤신다. 그는 절대로 극복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극복하지 않는다. "나는 천성이 예민해서요"라고 말한다. 시애틀 시호크스가 엘리트 쿼터백인 페이턴 매닝을 영입하면 팀의 향방이 완전히 바뀔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하면서, 그는 살짝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한다. "저는 여기서 눈물을 글썽이고 있습니다."(결국 영입은 없었다.) 라디오를 통해 열망이 전달되고, 열망의 아름다운 슬픔도, 생판 모르는 사람들의 눈부신 활약을 통해 구원받고 싶어 하는 통렬한 갈망도, 한 공간에 응축된 여러 목소리들도..."(229-230)


b.

  "이 대목은 주목할 만하다. 무릇 휴가란 불쾌한 것으로부터 잠시 벗어나는 일이다. 그리고 죽음과 부패를 의식하는 것은 불쾌한 일이므로, 미국인들이 꿈꾸는 궁극의 휴가가 죽음과 부패의 거대한 원시 엔진 속에 들어앉는 일이라는 사실은 어뜻 이상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 7NC 호화 크루즈에서, 우리는 죽음과 부패를 넘어서는 승리의 환상을 다양하고 교묘하게 구축할 수 있다. 한 가지 방법은 엄격한 자기 개선을 통해서 '승리'하는 것이다. 각성제를 맞은 듯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는 선원들의 선박 유지 보수 활동은 다이어트, 운동, 비타민 보조제, 성형수술, 프랭클린 다이어리 시간 관리 세미나 등등 개인적 자기 관리에 대한 노골적인 비유나 마찬가지다.

   죽음을 외면하는 방법은 또 있다. 관리가 아니라 자극이다. 열심히 노동하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노는 것이다. 7NC의 쉼 없는 활동, 파티, 축제, 명랑함과 노래는 아드레날린, 흥분, 자극이다. 그것은 당신에게 활기와 생기를 안긴다. 당신의 존재를 불확실하지 않은 것으로 느끼게 만든다. 열심히 노는 선택지는 죽음-두려움으로부터 초월할 수 있다는 약속이 아니라 그 두려움을 익사시키는 것에 가깝다. "당신은 저녁 식사 후 라운지에서 친구들*과 웃으며 쉬다가 시계를 보고 공연 시간이 다 되었다고 말합니다... 기립 박수와 함께 커튼이 내려가고, 일행들의 대화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다음엔 뭘 할까? 카지노에 가거나 디스코장에서 춤을 출까? 피아노 바에서 조용히 한잔하거나 별빛이 영롱한 갑판을 산책할까? 모든 선택지를 다 논의한 뒤 모두가 입을 모읍니다. '전부 다 하자!'" (<출항>,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 책자는 끊임없이 '친구들'을 언급한다. 죽음-두려움으로부터 탈출시켜주겠다는 크루즈의 약속에는 선상에서는 누구도 외톨이가 아니라는 약속도 담겨 있다.



c.

   "그러니까 나는 이전에 5.18에 관한 소설을 쓴 적이 있는데 실제 내가 그 소설에서 묻고 싶었던 것은,이라고 해야 할지 해보고 싶었던 것은 많은 글에서 당연히 이루어지는 혹은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는 대단원의 막, 의의와 지켜야 할 가치에 가기 전의 공간, 그 공간에 서서 그 공간에 멈춰 있는 상태로 눈에 보이는 것을 제대로 보는 것 같은 것이었다. 여전히 나는 공간과 기억을 그것이 어떤 식으로 흘러가 멈추는지 멈추지 않는지에 대해 늘 쓰고 싶다. 역사라는 것을 내 안에서 다른 식으로 그것이 어딘가에 멈춰 있더라도 공원에 앉아 그냥 우는 것이라도 그것이 결국 의미화될 수밖에 없고 의미화되어야만 하는 것일지라도 거기에 앉아 있는 상태 같은 것을 어떤 식으로든 계속 쓰고 싶었다. 그런 의문이 조금 구체화된 것은 도미야마 이치로와의 대담에서 이진경이 발표했던 글을 보고 나서였다. 그는 5.18당시 시위를 이끌었던 사람들의 증언을 언급했는데 그 증언의 내용이 ‘길을 가다 사람들을 만나 기뻤고 빵을 주니 빵을 먹어서 좋았다’는 의외의 내용이었다. 그 의외의 내용에 대해 이진경은 연대의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글을 결론지었다. 나 역시 그런 식의 글 외에는 다른 식의 어떤 것을 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증언을 곱씹어보고 그 증언이 가닿는 곳을 생각해본다면 그것은 홀로 거리에 있던 자가 나와 같은 사람을 만나는 데서 느낄 수 있는 우정과 연대일 것이며 5월의 광주에는 그것이 흐르고 있었을 것이다. 이전에 나는 어머니에게 5.18 당시의 이야기를 물었던 적이 있는데 어머니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시다가 사람들은 길가에 우르르 나가서 구경을 많이 했다고 했다, 사람들을 쫓아다니며 무슨 일이 있나 구경을 하러 나갔다고 했다. 빵을 주니 빵을 먹어서 좋았고 길에 사람들이 한번에 우르르 다니니 무슨 일이 있나 구경을 다니고 그런 이야기에는 그 말 자체를 둘러싼 여러 가지 것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나는 아니 여전히 나는 빵을 주니 빵을 먹어서 좋았다에서 멈춰 그 자리에 앉아서 더 나아가지 않고 가만히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자리에서 무엇이 보이는지 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어떤 자리에 멈춰버리는 것, 멈춰버리는 공간을 겹쳤을 때 나는 그것이 어떤 형태로 나에게 다가오는지에 대한 생각들을 줄곧 하고 있다. 또한 당분간 하게 될 고민이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9월 도쿄에서>, <<겨울의 눈빛>>, 박솔뫼)



a'.

   "데이비드 실즈는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2013)에서 이렇게 쓴다. "나는 위대한 인물이 방에서 홀로 걸작을 쓴다는 생각을 이제 믿지 않는다. 내가 믿는 것은 병리학 실험실, 쓰레기 매립지, 재활용 센터, 사형 선고, 미수로 끝난 자살 유언장, 구원을 향한 돌진으로서의 예술이다." 그는 소설가였지만 어느 순간 소설을 쓰기를 그만둔다. 그는 자신이 끌어모은 온갖 잡다한 메모와 기억을 콜라주한다. 그의 글은 논픽션인가 에세이인가 자서전인가."(<일기>, 정지돈)



c'.

   "'비-작가'는 증언자로서의 글쟁이다. 현장에 던져진 글쟁이는 작위의 실행을 가능하게 할 모든 자원을 상실한 상태에서 글쓰기에 돌입한다. 그는 자신이 '목격한 것'을 쓴다. 이 목격은 전통적 소설의 작위의 시스템에 등재된 시선들의 어떤 것과도 동일하지 않다. 그것은 사회적 총체성을 바라보는 전지적 시선, 신의 시선이 아니다. 목격자는 상황의 전부를 조감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자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내면을 깊이 바라보는 도덕적 자기관찰자의 시선과도 무관하다. 목격자는 협소한 내면을 응시할 시간이 없다. 그의 내면은 꺼져 있다. 그는 외부를 향해 열린, 가장 원초적인 감각-기계로 변모해 잇다. 마지막으로 그것은 사유와 저술의 매체 그 자체인 언어를 명상하면서 언어 속으로 깊이 침잠해들어가는, 메타적 성찰성의 시선, 끝없는 언어 속으로의 잠수와 실험도 아니다. 목격자에게 언어는 순수한 도구, 자신의 단단하고 명확한 도구성만을 갖고 있는 하나의 몸짓에 불과하다. 목격자는 언어를 사유하지 않고 언어에 매달리거나 언어와 유희하지 않고, 그것을 '사용'한다. 이런 사용 속에서 언어의 무능력이 처참하게 드러나는데, 가령 언어가 말의 '텅 빔'이라는 이 사태를 견디어내고 자신의 위신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요구된다. 이처럼 압도적 감각 부하를 걸어오는 현장의 급박함 속에서 쓰는 자, 쓰기 위해 벌어지는 사건을 목도하는 자, 이것이 바로 박솔뫼가 '욕망'하는 비-작가의 초상이다. (...) 다른 곳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당신에게 정치란? 혹은 정치적 올바름이란? - 나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가, 무엇을 보고 있는가 하는 물음에 긴장감을 잃지 않는 것. 그리고 행동하는 것. (...) 하지만 내게 환기시키는 것은 '그리하여 나는 무엇을 본 사람인가? 누구의 옆에 있는 사람인가? 그렇다면 이다음은?'이라는 몇 개의 질문이다. 내게 정치는 끊임없이 그 질문에 답을 하려 하는 과정이다. 또한 내 옆에 있던 사람들의 눈동자를 잊지 않으려는, 잊지 않겠다는 의지이다. 정치라기보다 윤리인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나는 다시 그 질문을 던진다. 지금 나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무엇을 본 사람인가? 내가 본 눈동자는 누구의 것인가?""(<탈존주의의 극장 - 박솔뫼 소설의 문학사회학>, 김홍중)



<蠢 #3 - 180526>



Posted by 공장장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