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강동호는 2016년 가을 혁신호 체제로 전환한 <<문학과사회>>의 권두언에서 잡지가 추구해야 할 ‘새로운 싸움’을 모색하기 위해 <<카이에 뒤 시네마>>를 참조한다. 그는 1951년 <<카이에>>의 창간호에 실린 프랑수아 샬레의 글로부터 “잡지와 비평을 연동시키는 작업과 삶에 대한 정치적 실천을 수행하는 것, 그리고 미래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는 것이 모두 동일한 작업이라고 믿을 수 있었”던 시대를 회고한다. 훗날 누벨바그의 기수로 등극하지만 당시 스물두 살 청년에 불과했던 프랑수와 트뤼포는 마찬가지로 1954년 <<카이에>>에서 이렇게 말한다.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논쟁을 통해 우리 모두는 행복해진다.” 하지만 이 행복의 근거와 대가는 무엇인가? 즉, 에밀리 비커턴이 <<카이에>>를 두고 “진정한 ‘전투 잡지’, 즉 전투 계획이 담긴 잡지”였다고 말할 때, 이들이 전투에서 얻어낸 성과와 흘렸을 피는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조르조 아감벤의 <<내용 없는 인간>>은 원경에서, 또한 역사적 관점에서 이 ‘전투’의 근원을 모색하며 이에 대해 다소 착잡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에 따르면 예술가들이 “한때 인간에게 생산의 영역을 열어 보이면서, 과거와 현실이 끊임없이 용접되는 공간과 대상을 구축하던” 시대가 있었으나, 발자크의 프랑오페르와 디드로의 라모를 거친 뒤 이제는 수집가와 비슷한, 포이에시스적인 능력을 거세(당)하고 이질화(를 경유하는 객관성)를 통해서만 자신의 근거를 찾아낼 수 있는 존재가 되었음을 지적한다. 예술가와 예술 작품은 분리되고, 예술은 ‘스스로를 파괴하는 무’가 됨에 따라 (4장에서 언급되는 디오니시우스 판 레이클이 겪었던 것과 같은) 종교적인 신성함-경이감을 상실한다. 결과적으로 쌓여가는 미학 이론들과 거듭되는 형식적 실험들 사이에서 예술가는 신과 역사를 동시에 잃어버린 ‘내용 없는 인간’이 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괴리는 기실 5장에서 인용되는 칸트가 ‘선험적 미적 판단은 근본적인 기준의 차원에서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만족스러운 해답을 찾아내는 데 실패한 순간부터 예견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칸트는 ‘미적 판단의 근원적인 토대가 되는 것’이 “개념과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으면서 어떤 식으로든 규정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에 판단 자체를 증명해 보일 수 없다는 무언가를, 다시 말해 ‘하나의 개념이지만 그것으로는 아무것도 인식할 수 없는 무언가’”임을 천명하며 이 질문을 돌파하고자 하지만, 이는 아감벤의 눈에 “판단 능력으로서의 취향”과 “창조 능력으로서의 천재성”을 화해시키기 위해 “양자 모두의 근원에 존재하는 초감각적인 기반이라는 신비주의적 사유에 호소할 수밖에 없”었던 칸트의 한계로 비춰진다. 아감벤 본인은 조금 다른 각도에서 이를 “우리의 예술 예찬은 필연적으로 예술의 망각과 함께 시작된다”는 말로 갈음한다.


예술 예찬, 혹은 예술을 인지하려는 우리의 노력이 예술의 망각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꽤 역설적으로 들린다. 나로선 칸트가 부여하는 신비주의적 지위와 아감벤이 제시하는 아이러니가 불확정성의 원리와 상응하는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책 전체에서 다소 이질적으로 보이는) 9장에서 아감벤은 예술작품의 원천적인 ‘구조’를 두고 제시되는 ‘리듬’과 ‘수’라는 두 가지 개념을 하나의 통일된 표현으로 묶을 수 있는 통계수학적 방법으로서의 양자물리학을 언급한다. 이러한 관점을 예술 작품에 대입해 보면, “미적 형식이라는 개념은 구조주의적 비평이 (예술 작품을 재료와 형식으로 보는 미학적, 형이상학적 정의에 의존하면서 예술 작품을 미적 대상으로, 동시에 원천적인 원리로 표현하기 때문에) 피해갈 수는 있지만 결국에는 극복할 수는 없는 마지막 장애물로 남는다”는 것이다.


이 불가능성 앞에서 미학은 미학적 효과로 제한되기 때문에, <<카이에>>의 야심만만한 영화 감독들을 비롯한 현대 예술가가 (스스로 예술가임을 의식하는 한) 취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이고 현실적인 태도는 (결국) 일종의 ‘전투’일 수밖에 없다. 강동호는 이러한 <<카이에>>의 시대와 대비하여 ‘공통의 토대의 붕괴’와 ‘원근법적 상상력의 몰락’을 겪고 있는 현재를 씁쓸하게 진단하지만 아감벤의 시선에서는 <<카이에>>나 <<문학과사회>>가 미학(및 역사)과 가지는 관계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을 것 같다. 결국 예술과 예술 비평이 현실과 마찰하는 경로는 자기 부정이라는 원칙 아래 방법론적 차원에 국한되기 때문이다. 정지돈의 경우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다소 위악적으로 보일 수 있는 태도를 취한다 : “예술은 예술이 예술적 효과를 생산하기 위해 사용한 수단에 주목할 때만 감상할 수 있다. 우리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다. 예술은 예술 작품이 어떻게 관찰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지시로서 구별들을 예술 작품 속에 집어넣는다. 이렇게 되면 자연과의 유사성이나 사회정책적 의도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예술의 효과에만 집중한다면 어떻게 될까? 다르게 질문하자면, “과거의 한 단상을 그것의 역사적 문맥으로부터 강제로 추방시키면서 단산이 지니고 있는 정통한 증언으로서의 특성을 단숨외 파괴하고 대신에 잠재적인 이질화의 힘을 부여하는” (벤야민의) 인용문들과, “일상적이라는 특징의 권위에 의해 의미를 보장받던 대상이 전통적인 방식으로 인식될 수 있는 가능성을 단숨에 잃고 충격과 자극을 전달하는 무시무시한 힘을 발휘”하는 키치, 레디메이드와 팝아트는 과연 우리에게 어디까지 동일해질 수 있을까? 미학의 땅을 벗어나기 위해 이 둘의 구분이 필요치 않다고 주장한다면, 결국 “종교예술 작품과 꼭두각시 인형, 오락용 기계장치, 사람과 자동기계로 꽉 찬 거대한 연회용 트로피 장식 사이에 커다란 차이를 두지 않”던 16세기의 감각으로, 신화들이 지배하던 세계로 우리는 회귀하는가? 하이데거가 본질적인 차원에서 서구 역사의 기초를 이룬다고 평가한 니힐리즘으로부터, 니체와 벤야민은 어떻게 탈출을 시도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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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쯤에서 생각나는 것은 <<문학의 기쁨>>에서 정지돈과 금정연이 김태용의 <<벌거숭이들>>을 두고 나눈 일련의 대화다.



   김태용의 소설이 갖는 일반적인 오해나 편견이 있다. 도저히 읽을 수가 없는 난해/난삽한 말장난, 문학이 아닌 망상이라는 거다. 조효원의 해설은 이에 대해 반박하며 김태용의 소설을 그렇게 읽는 자들을 기각한다. 그는 김태용의 "리듬-연상의 복잡계"가 "문학의 영토"를 떠난 "허무로 수렴될 것만 같은 절대적인 유언"이며 이는 "음악 이전 혹은 직전"의 "한계 영역"으로 돌입한다고 말한다(무슨 말인지.......)

   우리는 조효원의 이런 이야기들이 그가 기각한 다른 이들과 다르지만 동일한 양상의 오해를 조장한다고 보았다. 그러니까 김태용의 소설은 서사를 해체한 난공불락의 성,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불가능의 영역으로 돌입하는, 블랙홀로 진입하는 인듀어런스호 같은 소설이라는 인식을 다시 한 번 공고히 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겐 다른 접근방식이 필요했다.

(...)

   3부도 할까. 금정연 씨가 말했지만 우리는 이런 분석은 멈추기로 했다. 우리가 이렇게 김태용의 작품을 분석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의 소설에서 연상과 말장난을 거둬내면 의도와 계산이 곳곳에 숨어 있고 이는 무의미한 말장난, 툭 튀어나오는 연상과 화음을 이루며 손쉽게 기각되었던 재미나 의미를 건져낼 수 있기 때문이다. 김태용의 소설이 흔한 편견이나 수사처럼 대단히 난해하거나 심연스럽고 불가능한 무언가가 아니란 말이다. 게다가 이렇게 텍스트의 조각 속에서 드러나는 내용은 생각보다 평범하고 보편적이기까지 하지 않나. 그냥 한 번 읽고 두 번 읽으면 된다. 힝요오에 웃고 마라롱을 귀여워할 수도 있다. 불가능하지 않다. 가능하다.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불가능'은 같은 글에서 언급된 바 '불가능을 가장한 아카데미즘'을 지칭하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무슨 말인가? 이들의 판단에 김태용의 소설은 '가능한' 것인데 조효원의 해설은 그것을 '불가능의 영역'으로 밀어 넣고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나는 그것이 작품을 감당해내지 못하는 평론의 경직성 때문이라고 본다. 건축방식이 다른 작품, 일면으로 전체가 파악되지 않는 작품을 어떻게든 조감하기 위해서 위로만 위로만 올라가다 보면 숨이 탁 막히는 지점이 등장하는 것이다. 산소가 희박한 공간에서 뱉어지는 말들이 뭐냐면 바로 불가능한 말이다. 이때 평론의 작품에 대한 선의는 어떤 교조성으로서 발현하고 만다. 이것은... 전위의 문학이 아니라 문학의 막장 같은 것이 아닌가. 땅 속 어디서까지 버틸 수 있나 스스로를 시험해보는 굴착 작업이 아닌가. 오해가 오해를 낳는 상황을 타파하려면 우리에게는 "다른 접근방식이 필요"하다. (후략)


<蠢 #4 - 180623>

Posted by 공장장_ :